1. 탕평 정치 전개
영조 즉위 당시 정조는 정권을 잡은 노론과 그들을 몰아내고 다시 정권을 잡은 소론으로 나뉘어 서로 죽이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영조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기용하고 탕평론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영조는 노론 하나를 기용하고 상대 자리에서는 소론 쌍거호대를 실시하여 공평한 방안을 실현하였습니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을 통해 탕평 정치는 손자 정조로 이어졌습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의 갈등을 겪으며 영조의 탕평 정치적 의지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당시 대간을 이용해 상대당 수반을 공격하던 계파의 관행을 없애는 조치입니다.
당시 왕이 붕당의 주요 통로인 인사권에 직접 개입하여 조정에서의 당파적 영향력을 줄이고 왕과 정승들이 조정의 주도권을 확보해 갔습니다. 또 연좌법과 대역죄의 적용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대역죄를 빌미로 다수의 상대당 인사를 한꺼번에 탄핵하는 관행을 폐지했습니다.
조정에서는 대신들이 당파를 지정하거나 당파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아예 금지하여 당파의식을 없애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조의 치세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의 사색당파가 보편적이었습니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왕의 권력과 정책을 지지하는 유력한 정치 기구로 키웠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초월적 군주를 자처하며 선생님의 입장에서 대신을 양성하고 재교육하려 하였습니다. 특히 신진 인사나 중·하급 관리에 유능한 사람이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습니다.
2. 세도 정치 전개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세도 정치의 시작이 조선 사회 쇠퇴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죽고 그 어린 아들인 순조(재위 1800~34년)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고, 안동 김씨 가문이 세도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순조, 헌종(재위 1834~49), 철종(재위 1849~1963)의 3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책으로 약화하였던 당쟁과 일당 독재체제가 정조에 이어 어린 왕들이 잇따라 즉위하면서 절대 왕권이 소멸하고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로 변질되었습니다. 선조 이후 오랫동안 조선 정치권력의 기본 구조였던 붕당 정치가 완전히 붕괴하였다는 뜻입니다.
순조 때 집권한 안동 김씨 세력은 헌종 즉위 후 풍양 조씨 가문에 잠시 권력을 내줬으나 철종 즉위 후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세력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60년간 이어진 세도 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은 한없이 약해져 백성들은 물론 왕족들까지 안동 김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 빠졌습니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상의 정치가 각종 비리를 초래했지만, 전정, 군정, 환곡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외척의 세도 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지속되면서 이것에 대항하는 민란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는데, 그 중 홍경래의 난(1812년), 철종 때의 진주민란(1862년) 등이 대표적입니다.
몰락한 양반 홍경래의 지도 아래 수많은 몰락 농민과 영세 농민들이 참여했습니다. 청천강에서 의주까지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4개월 만에 관군에 의해 평정되었습니다. 홍경래의 난 이후 민란이 계속되면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세도 정권의 탐욕과 횡포가 날로 심각해지면서 재난과 질병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특히 19세기 들어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각해지면서 서민들의 생활도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1820년 전국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가 만연하여 많은 사람이 사망하는 비참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이 피해가 수년간 이어지면서 굶주린 백성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을 정도입니다. 그 전후로 서학(가톨릭)이 다시 전래하였으나 박해를 받았습니다.
3. 흥선대원군 섭정기
조선 후기에는 철종에 이어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명복이 조대비의 양자가 되어 왕위에 올라 고종(재위1863~1907)이 되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잃어버린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나라를 어지럽힌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을 가장 먼저 무너뜨렸습니다.
국민의 원한을 산 세제를 재검토했습니다. 논란이 가장 컸던 환곡제도를 사창제로 전환하고 군역제도를 개정하여 양반들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시행하여 민심 안정에 힘썼습니다. 또한 붕당의 온상으로 여겨지는 서원, 사현판 서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폐지되어 유생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또한 왕권 강화의 하나로 비변사를 폐지 수준으로 축소하여 의정부와 3군의 기능을 회복하고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재정비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곧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했습니다. 경복궁의 재건 외에도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 이하의 각 관청과 도성, 그리고 북한산의 건설도 동시에 완료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황폐해진 한양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한양 재건 과정에서 수많은 서민이 세금, 강제노동, 당백전으로 막대한 인플레이션을 겪었습니다. 이때 부른 판소리 경복궁 타령 가사에서 백성들의 피로와 굶주림을 엿볼 수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강력히 탄압했습니다. 프랑스 성직자와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의 조선만이 병인박해로 처형되었습니다. 자국 성직자가 살해된 프랑스는 강화도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프랑스는 조선에 사과와 손해 배상, 통상을 요구하였습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군은 프랑스군의 공격을 막았고 결국 프랑스군은 수많은 재물과 의궤를 빼앗아 철수하였는데 이를 병인양요(186년)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