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과의 7년 전쟁 (임진왜란, 정유재란)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20만 명의 일본군을 파견하여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조선 초기의 제승방략 체제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 일본군의 백병전 전력과 신무기인 조총에 압도당했습니다. 부산진성의 정발과 동래성의 송상현은 순식간에 일본군에게 격추되었습니다. 상주의 이일과 충주 탄금대에 진을 치고 있던 신립 군도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격파당했습니다. 선조는 뚜렷한 전략 없이 수도 한양을 버리고 압록강 근처 의주로 도망쳤습니다. 일본군은 개전 20여 일 만에 한양에 들어와 임진강 방어선을 뚫고 평양을 쉽게 점령했습니다. 이 기세로 가면 의주도 점령되지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옥포, 사천,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군을 대거 격파하고 일본군의 수군을 통한 보급 작전에 큰 영향을 받아 북진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 권율에게 심하게 패했는데 이를 행주대첩이라고 합니다. 삼남지역에서도 조선 각지 의병과 관군의 반격을 당했고,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지휘하는 대병력이 파견되었습니다. 조선군은 명나라 지원군의 힘을 빌려 일본군을 몰아내고 그 세력을 경상도 해안 일대로 철수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선조)이 도망치는 일을 만들었고, 이때 경복궁을 비롯한 모든 궁궐과 문화재가 소실되었습니다. 그러나 5년간 정체됐던 휴전 협상이 실패하면서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했습니다. 일본군은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크게 타격했지만, 명량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영화로도 제작된 명량해전입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고 일본군이 철수 명령을 내리고 노량대첩이 끝난 뒤 7년간의 임진왜란도 막을 내리고 노량대첩은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지만 안타깝게도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총에 맞아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1-1. 임진왜란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전국시대를 끝내고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하의 일본이 조선을 침략, 발발하여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입니다. 두 번의 침략 중 1597년의 두 번째 침략은 정유재란이라고 불렸습니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명나라와 여진족 등 동아시아 전역에 큰 영향을 주었던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의 왕국인 경복궁과 창덕궁 등 두 궁궐이 불에 타 소실되었고, 인구가 최소 100만 명 이상 감소하고, 농지의 3분의 2 이상이 황폐해지는 등의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1-2. 정유재란
정유재란은 1597년 8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아래의 일본군이 임진왜란 정전회담이 결렬된 후 다시 조선에 침입하여 이듬해인 1598년 12월까지 계속된 전쟁입니다. 일본에서는 당시 고요제이 천황의 연호를 따서 게이 초의 역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제2차 만력조선전쟁 또는 제2차 마력 조선의 역이라고 불립니다. 초기에는 일본군이 공세를 펼쳤고, 명량해전을 변곡점으로 조명연합군이 남해안 왜성 안에 숨어있던 일본군을 공격했습니다. 따라서 정유재란 때 조선군은 대부분 공격 편에 서 있었고 일본군은 대부분 방어 편에 서 있었습니다.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을 제외하면 조선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전투가 거의 없어 교착 전쟁 양상을 보였습니다.
2. 전쟁 이후 복구 사업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일본과의 두 차례 전쟁 끝에 쇠퇴한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또한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매일 병사들을 훈련해 국방을 강화하고 호적을 재정비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도성이 함락되면서 노비문서와 군적 등이 소실되고 이후 전란으로 노비, 호적 등의 문서가 파기되면서 많은 도망 노비와 유랑자들이 나타나 조선 후기 신분제의 붕괴를 초래한 것입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조정에 식량과 돈 등을 납부하고 관직을 맡은 공명첩과 선무군관 등의 임명장을 발부하여 조정의 재정을 충당하였습니다. 전란으로 호적자료가 분실되는 바람에 일부 부유층과 농민들이 가난한 양반의 계보를 구입하거나 위조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전쟁 중립의 공로로 관직을 획득하거나 노비에서 면제받은 사람이 다시 노비로 환원되어 불만이 생겼고, 광해군은 임진왜란 전후에 사료를 보충하고 공로가 있는 노비와 양인에게는 역을 면제하거나 관직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종전 후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백성 구휼과 부역을 면제하는 등의 정책을 활용해 전쟁 중 소실된 사고를 재정비했습니다. 또한 실리를 중시하는 중립 외교를 재개하여 새롭게 부상한 청나라와 멸망한 명나라 사이에 중립 외교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게 밀려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과 남인은 권력을 얻기 위해 광해군을 연합하여 축출하고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것이 인조반정입니다.
2-1. 인조반정
인조반정은 1623년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추대하였던 사건입니다.
반정의 뜻은 "올바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에 오른 광해군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펼쳤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는 후금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림들은 그를 불효자이자 의리에 어긋나는 군주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비난을 억제하기 위해 광해군은 많은 사림을 반복적으로 처형했습니다. 당시에 정권을 잡고 있었던 것은 북인으로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무리였습니다. 북인들로 인해 정권에서 외면당한 서인들은 광해군의 행적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북인을 완전히 몰락시키고, 서인 중심의 정권을 다시 성립시키게 되었습니다. 남인도 일부 정치에 참여하면서 서인 중심으로 남인을 견제하는 붕당정치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외교정책도 바뀌어 몰락해 가고 있던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친명 정치를 펼쳤는데, 이에 따라 참담한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