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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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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1. 제국주의 서구 열강 침략

 

1873년 음력 11월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고 정권을 10년간 장악한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면서 명성황후를 비롯한 여흥민씨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되고 조선의 대외정책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과의 평화 협상을 포기한 일본은 1875년(고종 12) 9월 20일(양력 10월 18일)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불법 입항하여 측량을 빌미로 정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강화도 수비대와 교전한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일본은 이러한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개항을 강요했습니다.

이에 조선에서는 찬반양론이 나왔지만 결국 개항론자의 위상을 강화하고 1876년 2월 3일(양력 2월 27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습니다. 이로써 국교 정상화 거부 정책을 펴온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항을 개항했습니다. 조약 체결 후 일본 세력은 점차 국내에 침투하여 위협과 모략을 펼쳤고 1910년 조선의 주권을 탈취했습니다.

이어 고종이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했을 때 가져온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읽고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사들을 기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후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고,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했습니다.

조정은 개화 정책을 담당하는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하였습니다. 1880년 10월 11일(양력 11월 13일) 미국과 수교한 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방 열강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맺은 조약은 모두 치외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치를 거의 할 수 없는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개화 정책에 대해 보수적인 유학층은 성리학적 전통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는 위정척사운동을 펼쳤습니다. 이 운동은 외부 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반 외부 세력의 자주 운동이지만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대 흐름에 뒤처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학층에서는 일부 혁신가들이 유교문화 계승을 주장했고, 일부는 서양 물질문명의 동서기론을 받아들여 개화운동에 참여했습니다.

 

2.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임오군란은 1882년 8월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일본의 지원으로 조직된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 구식 군인에 대한 정부의 차별 대우 그리고 임금 체불,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구 훈련도감 소속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항쟁입니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대원군의 지시로 민씨 정권에 맞서 일본 세력을 배척하는 운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홍영식 등은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청나라에 의지하려던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 정권 수립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을 갑신정변이라고 합니다. 개화파는 군대를 동원하여 낙성식에 참석한 대신과 참석하지 않은 수구파 대신을 처형하여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청나라의 개입으로 사흘 만에 붕괴하여 대일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쿠데타의 주동자 중에서는 홍영식과 박영교 등이 처형되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김옥균 등이 해외로 망명하면서 이들의 가족 친인척에게 연좌제가 적용되었습니다.

 

3. 갑오개혁 동학농민운동

조선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척사 운동은 청, 일, 러 3파전으로 대표되는 열강들의 각축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급 등으로 국가재정이 궁핍해져 농민들에 대한 약탈이 더욱 심각해지고, 일본의 경제침투(쌀의 강제 수탈)로 농촌경제가 붕괴하였습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커지면서 정치, 사회의식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는 농촌 지식인과 농민 간 사회 변화에 대한 욕구가 한층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평등과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부합했고 농민들은 동학 조직을 통해 대규모 세력을 결집할 수 있었습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내세워 전라도 일대를 점령한 뒤 전주를 점령했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정은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일본군은 이를 빌미로 거류민 보호 명목으로 함께 군대를 파견해 이를 막기 위해 농민군과 전주성에서 전주화약을 체결했습니다.

농민군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폐정 개혁 12조를 조정에 건의하여 집강소를 산발적으로 설치하고 조정도 중앙에 교정청을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난자 진압 선언을 무시한 일본은 조선 궁궐 경복궁을 급습하여 조선을 불법 점거했습니다. 이후 교정청을 폐지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교정청 출신 김홍집과 친일 인사로서 갑오개혁으로 내정간섭을 벌였으며 농민군은 외세 축출을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습니다.

먼저 공주를 점령하려던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협공으로 패했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하였습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한다는 명목으로 청나라와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와 무력 충돌을 벌였는데 이를 청일전쟁이라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난 진압이라는 조정 발표를 무시하고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고종을 위협하며 명성황후 민씨 세력을 축출하고 흥선대원군을 발족시키며 교정청을 폐지하는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교정청 출신 김홍집과 친일 인사를 기용하여 갑오개혁에 나섰습니다.

 

4.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명목상 조선을 완전히 독립시키고 요동반도를 할양하여 만주 침략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간섭하려 했습니다. 고종도 일본의 영향력 증대를 막기 위해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운 김윤식, 이범진 등이 새로운 친러 내각을 구성해 반일 정책을 구체적으로 수립했습니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 세 나라의 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우라 히로시로 일본 공사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서 친일 정권 수립을 위해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 재수생 등을 모아 경복궁에 몰래 침입하여 친러시아파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1895년 8월 일본의 강요로 김홍집을 내각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친일 내각이 출범했습니다. 당시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 유생들과 서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명성황후 살해 사건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자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살해 주모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해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했지만 나가사키 고등법원은 증거 불충분으로 판단해 전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어 을미의병이 발생하였고, 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의병 봉기를 일으켜 친일파와 일본 민간인을 공격하고 각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습니다. 을미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완, 이강년 등이 주도했습니다. 일본군이 의병 학살로 한양을 떠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러시아관 파천을 하였습니다. 고종은 1897년 덕수궁으로 회궁 했고 몇 달 뒤 대한제국 수립을 선언했고 국호인 조선은 사용을 중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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