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중기 개요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재위부터 조선 최악의 군주로 뽑히는 연산군이 재위까지를 "조선 전기(1392 - 1506)"라고 하고,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는 사건인 중종반정부터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세워지는 인조반정 그리고 청나라가 침략한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이 끝날 때까지(1506 - 1637)를 조선 중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도의 결함이 드러났습니다. 특히 토지 제도의 혼란으로 훈구파 재상의 대토지 소유는 토지 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신진사 사류의 불만을 사게 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사화라는 참극을 빚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진 사림 세력들이 자주 화를 당해 관직을 그만두고 지방에 가서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림들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사림들 간의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때때로 대립하였는데 이를 "당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의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 나중에는 넓은 땅을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핵심을 이루고 당쟁의 기반이 되는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어 16 - 17세기 주변국과의 전쟁(일본 : 임진전쟁, 청나라 : 병자호란)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였습니다. 이후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자 청나라를 정벌하는 '북벌론'이 대두되어 군대를 만들었으나 실천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북벌론의 반대로 북학론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조선 조정의 무능이 크게 대두되는 시기였습니다.
2. 정치 구도의 변화
중종은 1506년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반발하여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중종은 왕권 강화보다는 왕권의 안정을 이루는 데 주력하였는데, 그 방책으로 조광조 등 갑자사화에 밀려난 사림파를 중심으로 철저한 유교 개혁 정치를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 훈구파 세력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점차 싫증이 났습니다. 결국 중종은 1519년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을 실각시키고, 조광조와 사림파는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이를 기묘사화라고 합니다. 그 후 외척 세력이 새롭게 등장하였고, 중종의 재임 중기와 후기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나 정국이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1545년 조선 14대 왕으로 명종이 즉위하자,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이에 명종을 지지하던 소윤파가 인종을 지지한 대윤파를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합니다. 약 12년간의 섭정으로 인해 이 시기의 정국은 상당히 혼잡해졌습니다.
선조는 1567년 왕위에 올랐는데, 이황, 이이 등의 사림을 많이 중용하였습니다. 선조는 사림을 통해 자신의 취약했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기묘사화 때 당쟁으로 억울하게 숙청된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들을 복권시키고, 훈구파 대신인 남곤, 윤원형 등을 대역죄로 단죄하여 관작을 박탈하여 삭훈하여 민심을 안정시켰습니다. 그러나 후에 사림이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인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서인으로 분리되어 붕당이 형성되었고, 선조는 어느 한쪽이든 세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에 따라 정국이 일시에 교체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복되는 사화 속에서도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바탕으로 발전해 나갔고, 마침내 선조 때 다시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안에서 또다시 당쟁이 벌어지면서 정쟁은 파노라마처럼 되풀이됐습니다. 당쟁의 발단은 심의겸과 김효원 양파의 전랑직 암투에서 비롯됐습니다.
3. 경제 체제의 이완
양반 중의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과전 뿐만 아니라 공신전, 별사전을 받았는데, 이러한 토지는 모두 세습되었습니다. 양반 관리들은 또한 매입, 겸병, 개간 등의 각종 방법으로 이들의 소유지를 확대하였습니다. 특히 비옥한 삼남 지방의 넓은 공전을 침식하였습니다. 직전법이 폐지되자 이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는 농장의 확대를 가져오고 땅을 잃고 유망한 농민의 증가는 점차 사회적으로 크나큰 문제가 됐습니다.
양반 관리의 사치를 위한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공납과 진상도 농민들의 큰 고통이었는데, 방납까지 생겨 피해는 막심해졌습니다. 이러한 폐해를 개혁하기 위해 사림의 이이와 유성룡은 수미법을 주장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습니다. 환곡 제도에서 정부는 농민들을 상대로 일종의 고리대금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환곡은 원래 의창이 담당하는 일이었으나 의창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상평창이 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원래 농민 진영 정책에서 발단이 되었던 환곡은 점차 변질되었습니다.
특수직에 종사하는 직역 외에 양인에게 부과되는 신역은 주로 군역이었는데, 군역 또한 신역의 포납화 경향을 촉진하면서 제도가 붕괴되었습니다. 초기에 군역의 대가로 바치는 천은 상당히 고가에 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수포 대역제가 관행이 되면서 조납은 정남에 대한 인두세처럼 되고 평가도 평가절하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 공정액이 당시의 전세의 약 3배에 해당해, 두 사람에게는 지극히 과중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신역은 붕괴되었는데, 그 결과 농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불안정해졌고, 많은 농민이 유민이 되어 농촌은 황폐해져 갔으며, 각지에는 도적떼가 난무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모두가 알고 있는 임꺽정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