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1637 - 1897)
1. 개요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결국 서양인들은 17세기 중반 예송 논쟁에서 권력을 양보했습니다. 그러나 남인도 청남과 탁남으로 나뉘어 투쟁했고,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균형이 깨지면서 서인에게 철저히 진압되었습니다.
서인이 분열된 노론과 소론이 서로 격렬하게 대립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는 일당이 타당을 몰아내는 일당 전제화 현상이 나타나고, 환국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기이한 사건이 반복되었고, 영조와 정조는 당파의 균형을 고려한 인재를 기용하는 탕평책을 펼쳤습니다.
19세기 순조, 헌종, 철종 등 3대에 걸쳐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의 외척 세력에 의한 세도정치는 6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프랑스와 미국 간 무역 강요를 물리치고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여흥 민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었습니다. 또한 일본, 미국 등에 문호를 개방하였습니다.
1880년대 구식 군인들의 차별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발생하였고, 개화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던 김옥균과 그의 동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발생하였습니다. 1890년대에는 농민 약탈에 저항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동학농민운동의 진압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군이 충돌하였고, 친일적인 갑오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친일 세력이 친러시아파였던 명성황후를 암살하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일본군이 의병을 학살하는 동안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있었습니다.
2. 병자호란
사림파의 지지를 얻어 즉위한 인조는 다시 명나라와 친선 정책을 펼쳤고, 자극을 받은 청나라(후금, 여진족)는 각각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으로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침입했습니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왕 인조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의 굴욕을 겪었고, 왕세자인 소현세자를 비롯한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왕자들, 백성들이 인질로 잡혀갔습니다. 병자호란은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군신 관계를 확립하였습니다.
한편 조선 사회 자체의 갈등과 분열이 대립하면서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면서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3. 북벌론과 북학론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은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대해 사대를 치렀지만 실제로는 은밀히 국방 강화에 주력하고 청나라에 보복하기 위해 북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 주전파를 중용하여 군대를 육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습니다. 4만 5천 명의 군사력이 확립되었습니다.
이러한 북벌론은 1659년 효종이 사망한 후 사실상 일단락되었습니다.
현종과 숙종은 한때 서인을 배척했으나 결국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과 정치를 했습니다. 또한 서인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정세 변화를 관찰하고 북벌 움직임을 다시 제기하였으나 효종 때와는 달리 일시적인 현상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북벌은 어려운 판단 아래 보류되었고 결국 실천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이후 북벌론은 병자호란 때 자신이 초래한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하는 서민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정계 입문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정권 유지 수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북벌론은 전란 이후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외부 세계와의 고립을 초래하고 조선 사회의 후진성을 가속했습니다.
한편 당시 청나라가 중국을 장악한 후 국력이 크게 성장하여 화포, 자명종, 곤여만국전도 등 서양 문화재를 흡수하여 문화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유익한 것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이 나왔습니다.
4. 붕당 정치 변질
서인들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그 정치력은 근본적으로 지주제에 기반을 두고 있어 그들의 개혁안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서인 정권은 기층 사회의 동향에 대해 일시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인 정권의 위기는 표면적으로는 남인의 도전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서인이 주도하는 정국 속에서 남인은 끊임없이 진출했습니다.
특히 현종의 선생님인 윤선도는 남인계로서 오랫동안 야당의 입장에 머물러 있던 남인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했습니다.
남인들은 서인 정권이 추구하는 개혁의 부당성과 북벌 운동의 무모함을 비난하고, 예송논쟁을 일으키며 서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했습니다. 게다가 예송논쟁은 정체 문제와 관련이 있어 두 정파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예송논쟁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국상 중 자의왕대비의 복제 문제, 즉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계기로 발생한 것으로 적장자가 아닌 차남으로 왕통을 계승한 효종에 대한 적통 시비로 볼 수 있습니다. 서인의 주장은 왕도 왕 이전에 사대부로서의 예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고, 남인의 주장은 왕이 사대부의 예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며, 결국 서인은 신권중시 사상을, 남인은 왕권 중시 사상을 대표하게 됩니다.
1659년(현종 원년) 1차 논쟁에서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1674년(숙종 원년) 2차 논쟁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남인의 정치적 위상이 향상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신환국에 따라 1680년에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붕당 간 대립 국면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집권한 서인이 철저한 탄압으로 남인의 재기를 막았고, 이때 서인은 처음부터 완전히 남인을 몰아낸다는 노론과 남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소론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두 세력 간의 대립은 정국을 반전시켰으며, 이때부터 견제와 균형, 공론에 바탕을 둔 붕당정치의 기본 원리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상대 세력의 존재를 아예 인정하지 않으면서 일당 전제화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상대당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가 빈번하고, 정쟁의 초점이 왕위 계승 문제로 비화하는 등 붕당 정치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숙종은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몰아내고 정권을 모두 상대당에 위임하는 편법인사 국면을 형성하여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 붕당을 빈번하게 교체하였습니다. 숙종의 잦은 환국은 경종 때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할 정도로 발전하였고, 경종 때 황태자가 된 연잉군의 대리청정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움직임은 사회 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발생합니다.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정치 집단 간 상업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독점하려는 경향이 커졌습니다. 정치 쟁점도 예상대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군영을 장악하는 것으로 옮겨졌습니다.
반면 향촌 사회에서는 지주제와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사족 중심의 시골 마을이 낫기 어려워지고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