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조선 정조(6) 1. 붕당 정치와 공정 정책 정조는 영조시대에 이어진 탕평책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정치는 붕당정치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탕평책은 이론적으로는 붕당에 구애받지 않고 널리 인재를 임용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실제로는 대신들의 붕당 위에서 왕의 권위를 먼저 제시하는 왕권 강화 정책입니다. 영조는 군주, 대신들의 스승인 군사를 자처했고, 정권 후기 정조도 자신의 만물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인 만천명월의 주인공이라고 불렀습니다.탕평책의 실현에 있어서 영조와 정조는 차이가 있지만 영조가 노론이나 소론 등 붕당의 인물 중 비교적 온건한 인물을 기용하여 타협책을 이끌어가는 완론탕평을 실행하였다면 정조는 사건의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분하는 논쟁을 통해 정치를 전개하는 준론탕평을 실행하게 됩니다.. 더보기 조선 정조(5) 1. 선교(배다리) 연산군 시절을 연상케 하는 선교(배다리)가 한강에 놓여 있습니다. 연산군 시대의 선교(배다리)는 조운용 한강의 흐름을 장기간 막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아 정조는 70칸의 창고를 짓고, 선교(배다리)에는 건설에 필요한 수제 설비를 보관하고, 재사용하여 설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상설기구인 주교사를 설치하여 선교(배다리)를 관리하고, 헌릉, 영릉, 영릉으로 갈 때는 광나루에 선교(배다리)를 설치하였습니다. 2. 내명부 내명부는 조선시대 궁중의 왕비와 후궁,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궁녀의 총칭입니다. 정조는 주위 궁녀들을 통해 정순왕후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왕위 계승 후 대전 소속 궁녀들을 소멸시키고, 왕 주위에 궁녀를 두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중전 소속 궁녀도 제거하.. 더보기 조선 정조(4) [즉위 초기(2)] 왕권 강화 정치 개혁 정조는 홍국영이 실각한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정권 초기에 반대파에게 둘러싸였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습니다. 정조는 자기 뜻을 키우기 위해 문신을 키우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고, 병영을 동시에 개혁하여 왕의 병권을 강화하였습니다. 1. 규장각 정조는 왕으로 즉위 후 창덕궁 후원에 영조의 글, 어진, 유품 등을 모아 보관할 건물을 규장각이라 하였습니다. 규장은 28수 규성에서 이름을 따온 것입니다. 규성은 문장을 관할한다고 여겨졌습니다. 규장각은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왕실 박물관이자, 왕실 도서관으로 중국 사신이 가져온 선물도 이곳 규장각에 보관하였습니다. 세조와 숙종도 규장각을 설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규장각에서는 제학 .. 더보기 조선 정조(3) [즉위 초기(1)] 1. 아동 정책 정조는 또한 어린이에 관한 몇 가지 정책을 제안했습니다. "모든 부모는 아이들을 국왕처럼 대해야 한다. 이는 어린이들이 미래를 이끌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정조는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합니다. "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인데, 영조가 그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았기 때문에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1권, 3월 10일(신사) 정조는 즉위식이 거행되던 날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밝혔습니다. 정조의 이러한 천명은 죄인지자 불위군왕(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이라는 여덟자 막말을 유포시킨 일부 노론 벽파 측에 정면으로 화답한 것입니다. 정조는 양아버지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숭하고, 생부이신 장조(사도세자)의 .. 더보기 조선 정조(2) 1. 세손 시절 1761년(영조 37), 세손이 관례를 치렀습니다. 관례식에서 대재학 김양택이 쓴 반교문을 낭독하고, 국가의 장손으로서 대승을 계승한 사람임을 명심하고, 요, 순과 같은 사람이 될 것임을 명심해 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1762년 2월 김시묵의 딸을 세손빈으로 맞아 가례를 올렸는데, 훗날의 효의왕후입니다.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세손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는 영조에게 세손을 경희궁에 남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시 혜경궁 홍씨는 창덕궁에 있으면서 자녀와 생이별하는 것과 같았지만 그것이 아버지가 죄인으로 누명을 쓰고 사망한 상황에서 세손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 후 정조가 왕으로 즉위한 1776년까지 경희궁에서 살았습니다. 영조는 1764년(영조 .. 더보기 조선 정조 (1) 정조(조선 제22대 왕) 정조(생애 :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재위 : 1776년 4월 27일(음력 3월 10일) ~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은 조선 제22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입니다. 성은 이, 휘는 산 또는 성, 본관은 전주, 자는 형운, 호는 홍재입니다. 정조의 나이 11세 때 아버지 장조(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고, 할아버지 영조는 돌아가신 효장세자의 양자로 원적 하여 왕통을 계승했습니다. 1775년부터 1776년대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습니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여 왕에 즉위하였으며, 1800년까지 재위한 조선 22대 왕이었습니다. 재위 초기에는 홍국영에게 강력한 실권을 부여하는 세도 정치를 하였으나 1780년.. 더보기 세종대왕의 치세 (2) 1. 재상 발탁·국정 분담 세종은 삼승상이 조정의 크고 작은 일을 책임지도록 문치주의 정책을 펼친 의정부 서사제입니다. 주로 황희에게 인사·행정·군사적 권한을 위임하여 맹사성이 교육과 제도 정비를 담당하고, 상왕 태종의 중개역과 외교 활동을 윤회하여 담당하며,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가 분담합니다. 이후 김종서가 재상 대열에 합류했을 때, 김종서에게 국방 업무를 맡겼습니다. 맹사성과 황희는 입장은 같지만, 성격은 달랐습니다. 황희가 명확하고 강직하다면, 맹사성은 똑똑하고 부드럽고 섬세합니다. 또 황희가 학자인 인물이라면, 맹사성은 예술가인 인물입니다. 윤회는 예술가의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세종은 이들 재상의 재질과 능력에 따라 적절한 역할을 분담했습니다. 황희는 이조, 병조 등 과감한 업무를 잘했고.. 더보기 세종대왕의 치세 (1) 1. 대외 정책 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 은세공 대신 말과 포를 사용하기로 합의했고, 여진과의 관계에서는 최윤덕과 이천에게 압록강 상류 지역에 4군을, 김종서와 이징옥이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을 두도록 했습니다.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 회유정책을 펼쳤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으로 대마도를 무력으로 정벌했습니다. 이정무 사령관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적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군사적 승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고 조공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부정적이지도 않습니다. 2. 공녀 금은 조공 중지 조선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에 대한 사대 정책을 펴면서 매년 조공하고 받는 물품들이 조공품보다 풍부했지만, 공녀 등 인적 자원과 광물 조공이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더보기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