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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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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붕당 정치와 공정 정책

 

정조는 영조시대에 이어진 탕평책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정치는 붕당정치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탕평책은 이론적으로는 붕당에 구애받지 않고 널리 인재를 임용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실제로는 대신들의 붕당 위에서 왕의 권위를 먼저 제시하는 왕권 강화 정책입니다. 영조는 군주, 대신들의 스승인 군사를 자처했고, 정권 후기 정조도 자신의 만물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인 만천명월의 주인공이라고 불렀습니다.

탕평책의 실현에 있어서 영조와 정조는 차이가 있지만 영조가 노론이나 소론 등 붕당의 인물 중 비교적 온건한 인물을 기용하여 타협책을 이끌어가는 완론탕평을 실행하였다면 정조는 사건의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분하는 논쟁을 통해 정치를 전개하는 준론탕평을 실행하게 됩니다.

정조는 명절과 의리를 앞세운 '준론탕평'을 앞세워 소론, 노론, 남인 등에 준론파를 새로 영입하여 기존의 외척과 노론벽파를 제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가 제시한 명리와는 달리 현실 영조시대에는 각 당파가 탕평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재편되는 국면이 형성되었고 정조에 이르러 벽파와 시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상적으로 정조의 준론탕평은 시대의 한계와 모순된 주자학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자학의 이론을 존속시킨다는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탕평책은 강화된 왕권으로 정치 운영을 하여 세력 간 균형을 이루고자 했으나 기존 정치세력의 참여기반이 좁아지면서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을 끌어들이지 못했습니다. 왕권 중심의 정치운영은 새로운 정치이론을 제시하지 않고 점차 보수화되고 있습니다. 결국 관료, 산림, 외척 등은 정치 논리 없이 서울과 왕실을 중심으로 가족 확장에 주력해 왔습니다. 그 결과 정조 사후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등장했습니다.

 

 

2. 군사부론

 

정조는 세자 때부터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왕이자 아버지이자 선생인 군사부론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즉위 후 경연를 열어 경연관과 재상, 승려들의 학문적 실력을 점검하고 정조 스스로 바로잡거나 사서육경 해석 의견을 놓고 학자, 경연관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세자 시절 스승 김종수가 정조에게 여러 차례 통치자, 왕, 아버지가 되자고 강조한 것은, 세자의 평소 생각과 일치합니다. 김종수는 정조에게 2년 정도 원시 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의 본질을 가르쳤습니다. 김종수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고 요순시대의 이상을 실현했듯이 군주는 실력을 높여야 한다며 군주는 학문과 군사의 다방면에서 탁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세자가 만인을 포용하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숭고한 의지를 가지고 이를 이루는데 게을리하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김종수는 입버릇처럼 세자에게 왕, 선생,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또한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견해는 틀렸고, 학자의 해석에 따라 뜻과 의미가 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허목과 윤휴를 비난하고 원시유학의 가치를 설명했고, 정조는 원시 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을 올바른 학문인 정학으로 간주했습니다. 김종수는 소론 벽파의 주도로 노론부터 당론까지 세자를 공격할 때, 홍국영 등 소수의 소론 당내 사람들과 함께 세자 보호에 앞장섰고 정조는 김종수를 신뢰했습니다. 또한 외가 친척들의 정치 개입을 배제해야 한다는 의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정치의 근본을 의리로 규정한 정조는 김종수를 각별히 아꼈습니다.

정조는 노론 벽파를 극도로 혐오했지만, 노론 청명당파를 특히 믿고 중용했습니다.

특히 김정수는 정조를 공격한 김귀주, 정조를 보호한 홍국영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이들의 정치 몰락을 촉구하는 공격을 주도하였습니다. 군주의 안위만을 고려하여 김석주를 본받겠다고 공언하고, 친척이나 친구라도 문제가 있는 사람을 추방하겠다는 것입니다. 김종수의 이런 신념은 노론당 내에서도 큰 적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대전통편발행사업

 

대전통편은 1785년(정조 9) 발간된 법전으로, 정조는 대전통편 편찬 작업에 관심을 갖고 직접 참여하여 보고를 받았습니다. 대전통편은 총 723조로 이중 이전 2112조, 호전 73조, 전례 101조, 병전 265조, 형전 60조, 공전 12조 등이 있습니다.

조선의 법제는 경국대전 이후 대전속록(1492년)이나 경국대전주해(1555년) 등 해석하기 어려운 조항에 주기하거나, 판례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정비되어 영조 1746년까지 경국대전 중 영구히 지켜온 것을 골라 속대전을 만들었습니다. 속대전은 탕평정책의 실시에 따른 권력구조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정조는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합병하여 대전통편을 작성하고, 각 조항에 대해 경국대전을 원, 속대전을 속으로 표기하였으며, 이후 재정조항을 증으로 표시하고, 동시에 폐지된 조항도 그대로 게재하여 그 아래 금폐로 표기하였습니다.

대전통편은 새로 도입된 규장각 제도를 보완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법령입니다. 대전통편은 이후 고종 2년(1865) 대전회통이 발행될 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

 

 

4. 신해통공

 

채제공은 1778년(정조 2), 박제가, 이덕무 등과 함께 사은사 겸 진주사로 베이징을 방문한 뒤 평소 자신이 주장해온 이용후생 경제학을 재확인했습니다. 함께 돌아온 박제가가 '북학의'를 열고 조선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경제 활성화가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채제공은 육의전이 금란전권을 함부로 사용하여 물산을 독점하고, 물가를 올리는 것을 막기 위해 금란전권 폐지를 권고했습니다. 정조는 이를 받아들여 신해통공 조치를 통해 금란전권을 폐지하였습니다.

시전 상인들은 시장을 철수시키고 반대하며 궁궐로 들어가는 채제공을 막고, 채제공을 반대했지만, 채제공은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당시 발달한 민간 상업에 힘입어 시전 상인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수를 마련하여 나라 살림을 늘렸습니다. 그러나 신해통공을 통해 이익을 얻은 것은 소상공인이 아니라 사상도고와 같은 독점적 도매상이었습니다.

신해통공은 육의전을 제한할 뿐 사상도고를 제한하는 방안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재임 중 신해통공을 계속했지만, 물가를 억제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정조 사후 사상도고 독점으로 인한 폐해가 1833년 쌀 폭동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5. 서한 정치

 

정조는 조정의 중신들에게 사적인 편지를 보내 배후에서 정치를 조정했습니다. 정조가 보낸 편지 중 지금까지 채제공, 조심태, 홍낙임, 심환지 등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정조는 대신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문제를 논의하고, 상소에서 제기된 민감한 현안과 인사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고 자신의 건강 상태, 대신의 대소사 등을 언급했습니다. 정조의 편지는 대부분 자신이 쓴 것으로 봉인하여 비밀리에 보냈습니다.

정조는 새로운 문체에 비판적이어서 박지원을 연암체로 지정하여 문체를 바로잡았는데, 자신은 편지에서 비속어, 속담, 욕설, 이두 등을 아낌없이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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