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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치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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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상 발탁·국정 분담

 

세종은 삼승상이 조정의 크고 작은 일을 책임지도록 문치주의 정책을 펼친 의정부 서사제입니다.

주로 황희에게 인사·행정·군사적 권한을 위임하여 맹사성이 교육과 제도 정비를 담당하고, 상왕 태종의 중개역과 외교 활동을 윤회하여 담당하며,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가 분담합니다.

이후 김종서가 재상 대열에 합류했을 때, 김종서에게 국방 업무를 맡겼습니다. 맹사성과 황희는 입장은 같지만, 성격은 달랐습니다.

황희가 명확하고 강직하다면, 맹사성은 똑똑하고 부드럽고 섬세합니다. 또 황희가 학자인 인물이라면, 맹사성은 예술가인 인물입니다. 윤회는 예술가의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세종은 이들 재상의 재질과 능력에 따라 적절한 역할을 분담했습니다. 황희는 이조, 병조 등 과감한 업무를 잘했고, 맹사성은 예조, 상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를 잘했으며,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측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세종은 부드러운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필요한 부분은 황희에게 맡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황희는 변경 안정을 위해 육진 개척, 공동체 설립에 참여하여 지원하고 외교와 문화재 제도 정비, 집현전 중심의 문화재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습니다.

한편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하여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을 맡아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술적 소양을 점검하기도 하였습니다. 맹사성과 유사한 윤회는 주로 외교 업무, 상왕 태종과의 매개 역할, 외교 문서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습니다.

세종은 그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 남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이 재상들은 서로 분장하기도 하고 담당 분야와 업무를 공유하기도 합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공정하고 명확하게 공사를 구분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2. 의정부 서사제 시행

 

세종은 맹사성, 황희, 권진, 김종서 등 재상에게 일정한 권한을 위임하고 정무를 담당했습니다. 세종은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고, 제6조 관료들을 병권과 인사권 외에 의정부 스님의 의결을 거쳐 정무를 왕에게 전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 표면적인 이유는 건강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종이 왕권의 대부분을 의정부로 옮기기로 한 것은 영의정이 황희였기 때문입니다. 황희는 오랫동안 벼슬을 했기 때문에 처세를 잘한다는 비판도 했습니다. 야사 「연고실 기술」에서 황희는 한 젊은 성균관 유생 앞에서 "정승이 되어 왕의 잘못을 파악할 수 없느냐"는 꾸지람을 듣고 오히려 기뻐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 세종을 보좌했습니다.

세종대의 또 다른 정승은 맹사성으로 청렴한 관료지만 자신의 의견과 개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세종도 맹사성을 적극 신뢰하며 황희,  권진과 함께 중용했습니다.

또한 세종 후반에는 황희 등이 추천한 김종서 등을 재상으로 중용하여 정사를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3. 과학 발전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천문 관기구인 간의, 혼천의, 혼상, 천문기기 겸 시계인 일성정시의, 해시계(앙부일구)와 물시계(자격루), 누호 등 서민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 도움이 되는 과학기기를 발명했습니다. 궁궐에는 과학관이라 불리는 흠경각이 세워지고 과학기구가 설치되었습니다.

  "흠경각을 완성했습니다.
   대호군 장영실이 지은 것으로 그 규모와 제도의 묘미는 왕의 결단에 따른 것입니다.
   흠경각은 경복궁 침전 옆에 있습니다.
   (생략)
   지금 흠경각은 하늘과 날, 일조와 누수의 시간입니다.
   혹은 사신, 십이신, 고인, 종인, 사신, 옥녀 등 다양한 기구를 순차적으로 제작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직접 힘을 써서 하지 않아도, 스스로 치고, 스스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일을 시키는 듯하였습니다.
   보는 사람들은 놀라고 신기해하겠지만 위에서 보면 일수와 머리카락 사이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를 만드는 계교가 참 묘합니다.
   물이 새고 남은 물을 이용해 경사진 그릇을 만들어 하늘이 한산한 것을 봅니다.
   산 주위에 한 폭의 풍도를 두어 백성들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이전 세대에는 없었던 아름다운 우화입니다.
   임금님은 항상 이곳에서 만나 생각을 일깨우고 밤낮으로 걱정합니다.
   어떻게 다만 성탕의 목욕반과 무왕의 호유명과 같습니다.
   그는 법천을 따랐고, 때를 받들어 백성을 사랑하고 농경을 중시했습니다.
   인후의 덕은 주조처럼 아름답고 끝없이 전해져야 합니다."
                                                         

                                                                                                                                                      세종실록 80권
                                                                                                                               세종 20년(1438년) 1월 7일(임진)

 

3-1. 천문, 역법

고금의 천문도를 참고하여 새로운 천문도를 만들었습니다. 이순지와 김담 등에게 중국 수시력과 아랍 회회력 등 주변국 역법 편찬 역서 '칠정산'의 내편과 외편을 참고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역법을 독립적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다. 또 이순지는 천문, 역법 등에 관한 책 '제가역상집'을 편찬했습니다.

 

3-2. 금속 활자 그리고 인쇄술

태종 때 제작된 기존 청동 활자 계미자가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아 조잡한 단점을 발견하자 세종은 1420년 경자자, 1434년 갑인자, 1436년 병진자 등을 주조하여 활판 인쇄술을 더욱 발전시켰고, 이 시기에 밀랍 대신 조립을 하는 방법으로 인쇄 효율을 높이고 서적 편찬에 힘썼습니다.

 

3-3. 도량형 통일 및 총통의 제작

1431년(세종 13)과 1446년(세종 25)에는 아악의 음률을 확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었던 동관 황종관을 표준기로 지정하고, 그 길이를 자로 하여 물을 넣은 단위로 조선의 도량형을 확립하였습니다.

천자총통, 지자화포 등 신무기를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총통의 제작과 사용 방법에 관한 서적인 총통등록도 편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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