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초기(1)]
1. 아동 정책
정조는 또한 어린이에 관한 몇 가지 정책을 제안했습니다. "모든 부모는 아이들을 국왕처럼 대해야 한다. 이는 어린이들이 미래를 이끌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정조는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합니다.
"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인데, 영조가 그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았기 때문에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1권, 3월 10일(신사)
정조는 즉위식이 거행되던 날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밝혔습니다. 정조의 이러한 천명은 죄인지자 불위군왕(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이라는 여덟자 막말을 유포시킨 일부 노론 벽파 측에 정면으로 화답한 것입니다.
정조는 양아버지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숭하고, 생부이신 장조(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으로 추앙하였습니다. 그러나 친아버지를 장헌으로 추앙하는 것은 '오직 종천의 슬픔과 애모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에 불과해 더 이상 친아버지 추모 사업을 할 의사가 없음을 시사하였습니다.
당시 정부를 장악했던 노론과 첨예하게 대립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정후겸과 홍인한을 추방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이 문제를 끝냈습니다. 대신들은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을 요구했으나 어머니 현경왕후가 단식을 하며 반대하면서 포기했습니다.
장조의 추모와 복권은 정조의 오랜 숙원이었지만 어려웠습니다. 세자 때부터 청정을 대신해 정조는 장조(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했고, 영조는 장조(사도세자)를 살해한 임오년 처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알렸고, 영조는 이를 언급한 사람은 왕법으로 처분해 달라는 유훈을 남겼습니다.
정조가 즉위하자 노론자 측에서 정조 문제를 제기하며 재조사를 요구했고, 정조가 앞장서서 홍국영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소론이 장악한 조정에서 그들의 의심을 불식시켰지만, 정적인 노론 벽파를 견제할 수단을 사실상 상실한 것입니다. 정조가 장조(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겨 추모사업을 재개한 것은 13년 만입니다.
2. 정유역변
정조는 1777년(정조 1) 7월 경희궁에 악당이 침입하자 창덕궁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8월 또 다른 괴인이 침입했다가 붙잡힌 뒤 조사 결과 정조의 외척 홍상범, 홍계능 등이 귀양에 처한 홍술혜와 공모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홍국영이 이 사건을 책임지고 맡았습니다. 홍국영이 이들에게 추대시킨 은전군을 자진하도록 하였고, 홍술해는 홍상범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홍계능은 고문을 당해 사망했습니다. 정후겸의 양어머니 화완옹주는 교동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이처럼 정조 즉위 1년 동안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은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만이 무사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3. 홍국영의 기세와 몰락
정조는 홍국영을 특별히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시키고, 왕의 호위를 위한 숙위소를 설치하고 홍국영을 숙위대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전례 없는 이런 조치로 홍국영이 강력한 실권을 잡았습니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받아 모든 정사에 관여하였고,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 인사권 등을 총괄하였으며, 백관은 물론 팔도감사와 수령까지 고개를 숙였습니다. 홍국영의 이런 기세는 실세 정치의 시작으로 평가됩니다.
정조는 세자 때부터 신변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정조는 즉위 초기에 반대세력에 둘러싸여 홍국영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776년(정조 즉위년) 6월 23일 정후겸과 홍인한의 부하인 윤약연, 홍지해 등이 고국을 방문했을 때 홍국영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세자 때는 "옷을 벗고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저궁의 고립과 위험이 어떠했고, 나라의 사세의 간간함이 어떤지 알 수 없다."며 홍국영이 스스로를 보호하려 하였습니다.
“홍국영에 있어서 궁료로 있을 때 임금의 몸을 보호해 한쪽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는 공로가 있었으니, 무릇 이 사람을 장해하려는 흉계를 하는 사람은 곧 우익을 제거해 버리려는 흉심이 있는 것이다. 즉조한 이후 이 신하 하나만으로 믿고 있는데 반드시 장살하고야 말려하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장차 어느 지경까지 갈 작정입니까?"라고 하여 홍국영에 대한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홍국영은 사적인 관계의 횡포로 인해 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에게 할머니가 된 정순왕후가 독단적인 한글 전교를 통해 후궁을 선택하자, 자신의 누나를 원빈으로 만들려고 하는 등 무리한 권력 강화를 시도했습니다.
홍국영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원빈이 왕비에게 독살당했다고 믿고 복수를 위해 왕비의 음식에 독극물을 넣다가 발견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홍국영이 몰락한 근본 원인은 자신이 권력욕을 너무 많이 내 외가의 정치 참여를 억제했던 정조의 정책과는 달리 자신이 외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경왕후는 『한중록』에서 원빈이 죽은 후 홍국영이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내전 중인 나인을 멋대로 국문하고, 은언군의 아들인 상계군 담을 앞세워 왕위 계승권에 참여하려 한 것도 정조가 홍국영을 추방한 이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779년(정조 3) 홍국영이 도승지를 사임하였습니다. 정조는 백마와 돈을 홍국영에게 선물하여 귀향시켰습니다. 홍국영은 귀향 후 탄핵 소추가 잇따르면서 강원도 횡성과 강릉 등지로 방출되었다가, 1781년(정조 5) 사망했습니다. 정조는 홍국영 사망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사려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공을 세운 것은 어떻습니까? 제가 의지하는 게 어때요? 처음에는 지위가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었기 때문에 권병에게 임시 의뢰하였으나 권병이 너무 무거워서 지위가 너무 높아서 조심스럽게 두려워하고 자기 신중한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총애만 믿고 위복을 마음대로 사용하여 극죄를 저질렀습니다. 돌이켜보면 이게 제 단점인데 반성할 겨를이 없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요?"라며 스스로를 탓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