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손 시절
1761년(영조 37), 세손이 관례를 치렀습니다. 관례식에서 대재학 김양택이 쓴 반교문을 낭독하고, 국가의 장손으로서 대승을 계승한 사람임을 명심하고, 요, 순과 같은 사람이 될 것임을 명심해 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1762년 2월 김시묵의 딸을 세손빈으로 맞아 가례를 올렸는데, 훗날의 효의왕후입니다.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세손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는 영조에게 세손을 경희궁에 남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시 혜경궁 홍씨는 창덕궁에 있으면서 자녀와 생이별하는 것과 같았지만 그것이 아버지가 죄인으로 누명을 쓰고 사망한 상황에서 세손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 후 정조가 왕으로 즉위한 1776년까지 경희궁에서 살았습니다.
영조는 1764년(영조 40) 세손을 잃은 장남 효장세자의 양자로 왕위 계승자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장남이지만 9세에 세상을 떠났고, 효장세자의 빈, 효순 왕후도 정조가 태어나기 전인 1751년(영조 27)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정조의 양자 입적은 왕위 계승권을 유지하는 형식적 절차였습니다.
김종수는 군주는 통치자이며, 학문 선생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군주나 스승 중 한쪽뿐만 아니라 양쪽을 겸해서 이른바 '군사'가 된다는 뜻입니다. 김종수는 통치자가 올바른 학문을 아는 것은 군주가 스스로 노력하여 학문을 이끌어야 가능하다고 교육했습니다.
이상적 시대인 하, 은, 주 삼대 시절에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었고, 그 후에는 시기부터 대신들이 학문을 이끌었지만, 지금은 공정한 새 사회를 표방하고 개혁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삼대 때처럼 군주가 학문 정치를 이끄는 실력을 다시 한번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은 통치자이자 선생이라는 것입니다. 김종수는 '군사부'로 불리며, 통치자는 통치자이며 스승의 역할도 겸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만개의 강을 밝히는 일월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 임무를 자신이 맡아 실천할 때, 왕은 왕으로서, 개인적으로도 큰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김종수는 또한 군주는 만인을 포용해야 합니다." 이 제안은 후대 정조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정조는 그의 기대에 적극 부응했습니다. 결국 나중에 모든 대신이 정조야말로 군주요, 스승인 위대한 성인입니다.
그는 나중에 국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통치자, 아버지,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자신도 일찍 일어나 공부했습니다. 정조는 사서오경 중 춘추, 진서, 한서에서 중국에 이르는 사서, 국내 사서와 한글 소설, 의사들이 쓴 의서 등 다양한 책을 읽었습니다.
김종수의 존재는 정조의 업적을 방해하는 역적이며, 노론당 내에서도 당론에 반하여 독선적인 인물로 인식되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정조에 대한 구상과 이미지 만들기는 그의 사후에도 성공적으로 확립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론대로라면 김종수는 노론 벽파 외에도 노론 시파도 불경의 뜻을 가진 사람이라고 질타했고, 사도세자의 신분을 주장하는 영남 남인들과 소론, 노론 시파도 거세게 공격했습니다.
정조가 세손이었을 때 김종수가 노론 중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할 때, 소수의 노론 내 사람들과 극렬하게 반대하였고, 이천보, 유척기 등 소수의 사람과 함께 소론 등과 손잡고 세손을 지지하였습니다. 그의 정성은 세손을 감화시켰습니다.
세손 시절 정조는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세자는 정기적으로 유학 강연을 듣고 토론 학습을 했는데 왕은 경연을, 세자는 서연을 했습니다.
세손도 사도세자와 함께 서연을 열었고, 서연을 전담하던 세자시강원과 세자의 호위를 담당하던 기관인 세자익위사 문관이 맡았습니다. 당시 서연에서 논한 책은 효경, 소학초략, 동몽선습 등의 아동용 입문서를 시작으로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경서를, 10세 이후에는 사략, 강목 등의 역사서를 각각 강의하고, 17세 때는 성학집요, 주자봉사 등을 하루 세 번씩 강행하였습니다.
서연은 존현각에서 열리며, 주변의 주합루, 관문루, 동이루 등의 누각에는 도서관으로 책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1774년 정조가 '경희궁지'를 지어 자신이 살았던 곳과 공부했던 곳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정조는 무예의 단련에도 경학 못지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활쏘기를 좋아하여 즉위 후 정조의 활쏘기 결과를 기록한 어사고충첩에는 10여 차례가 기록되어 있으며, 50발을 쏠 때마다 49발이 명중되었습니다.
1769년 세손 산은 흥은부위 정재화 등과 함께 기생집에 드나들 때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목격했습니다. 화완옹주, 홍국영 등은 각각 혜경궁 홍씨에게 알렸고, 혜경궁은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찾아가 어린 세손이 사도세자처럼 될까 염려된다며, 사건 처리를 요구하였습니다. 홍봉한은 개입을 거부했고, 혜경궁 홍씨는 단식 농성을 했습니다. 홍봉한이 나와 기생들을 추방하고, 세손에게 보고한 후 사건을 수습했습니다. 이것은 왕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혜경궁 홍씨 한중록에 나와 있습니다.
2. 대리청정
노론 벽파가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하자 세손은 조심스럽게 일거수일투족에 주의했습니다. 특히 홍국영은 그에게 불리한 자료와 물품을 찾아 제거했고, 세손 시절 스승 김종수가 당론에 맞서 '택군'이라는 이유로 벽파를 공격했습니다.
또 김종수는 외가 친척 중심의 벽파와는 달리 또 다른 정파인 청명당 혹은 청명파를 구성하였습니다. 1772년 청명(청렴과 명예)을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하며, 사림 정치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노론 속에서 청명류의 정치적 결사체가 드러났을 때, 당파를 멸망시키려 했던 영조는 그들이 오히려 당론을 조장했다며, 김정수를 비롯하여 조정, 김치인, 정존겸, 이명식 등을 유배 보냈습니다. 당시 김종수는 경상도 기장현의 금갑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습니다.
영조는 1775년(영조 51) 봄, 82세의 고령으로 연로하여 정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세손에게 청정대행을 의뢰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손이 대리청정하면 자신들의 입지가 곤란해질 것을 우려한 노론 벽파는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때 세자의 나이는 24세였습니다. 영조는 홍인한을 파면하고, 옥새를 세자궁으로 옮겨 청정을 대신했습니다. 장조(사도세자)를 궁지에 몰아넣은 홍계회, 김상로, 정후겸, 김귀주 등 노론 벽파들은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 했습니다. 영조는 세손에게 "김상로는 너의 원수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세자시강원의 홍국영이 이들을 탄핵하면서 세손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영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순감군의 수점권을 세자에게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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