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외 정책
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 은세공 대신 말과 포를 사용하기로 합의했고, 여진과의 관계에서는 최윤덕과 이천에게 압록강 상류 지역에 4군을, 김종서와 이징옥이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을 두도록 했습니다.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 회유정책을 펼쳤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으로 대마도를 무력으로 정벌했습니다. 이정무 사령관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적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군사적 승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고 조공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부정적이지도 않습니다.
2. 공녀 금은 조공 중지
조선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에 대한 사대 정책을 펴면서 매년 조공하고 받는 물품들이 조공품보다 풍부했지만, 공녀 등 인적 자원과 광물 조공이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태종과 세종 때는 명나라 처녀들과 금은을 바친 적이 있습니다. 처녀 조공은 처녀 진헌이라 불리며 태종 때에 진헌색 기관이 설치되었습니다. 세종 때에 명에 조공으로 공녀는 74명을 바쳤는데 태종 때의 40명보다 증가했습니다.
태종 때 명나라에 조공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에 파견된 공주들은 이송 전에 입궁하여 왕비의 위로를 받았고, 남은 가족들은 우대받았습니다.
태종, 세종 때 조선인 공녀 중 일부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어 황제 사후 순장되었습니다.
세종은 이복동생 함녕군과 인순부윤 원민생은 명나라까지 보내졌다가 작고 마른땅에 금은이 없다는 이유로 금은 조공 면제를 요구했습니다.
1430년(세종 12)에는 말, 비단, 인삼 등 다른 진상품을 많이 보내는 조건으로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이 면제되었습니다.
3. 대마도 정벌
고려 말부터 이어진 왜구 약탈 문제는 처음에는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회유정책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는 전국적인 단속을 실시했지만, 남해안에서의 왜구 약탈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1419년(세종 1) 왜구가 침입하자 같은 해 6월 19일 이종무는 삼도 절도사가 되어 삼도 예하 절도사 9명과 전함 227척, 장병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였습니다. 열흘 후, 대마도의 도주는 항복했습니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연행된 조선인과 납치된 명나라 사람들도 구출했습니다. 조선군은 마도에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이후 대마도주에 대한 간청을 받아들여 1426년(세종 8) 내이포, 부산포, 염포의 3포항을 개방하였고, 1443년(세종 25)에는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척의 교역을 허용하는 계해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왜구를 관용하고 약탈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정책으로 14세기부터 이어진 왜구의 침입부터 삼포 왜구가 발생하기까지 약 100년 이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 왔습니다.
4. 4군 6진 개척
"조상이 지켜준 것은 촌토라도 버릴 수 없습니다."
- 세종실록 78권, 세종 19년(1437년) 8월 6일(계해)
태종 이래 불안정한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을 물리치기 위한 정벌 계획이 세워졌고 세종은 요동 정벌 이후 진정된 북진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432년(세종 14) 두만강 하류의 석막을 공격하여 용북진을 설립하였습니다.
1433년(세종 15) 최윤덕에게 압록강과 개마고원 일대 여진족을 소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최윤덕이 이끄는 부대가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격파했고, 세종은 이 일대에 여연, 자성, 무창, 우예 등 4개 군을 설치했습니다.
김종서 부대는 함길도 지역을 습격한 여진족을 소탕하여 두만강 이북으로 몰아내고 1437년(세종 19) 이 일대에 온성, 경원, 경흥, 부령, 회령, 종성 등 6개 진을 설치하여 북방영토를 개척하였습니다.
이후 이 지역의 관리와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삼남지역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토관 제도 등을 실시하였습니다.
5. 훈민정음 창제
1420년(세종 2) 중앙집권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연구기관으로 궁중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일반 관료 이상을 우대하였습니다.
1443년(세종 25) 세종은 백성들이 당시 문자인 한자를 쉽게 배우지 못하고 한국어와 한자가 통하지 않아 표현하고 싶은 내용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직접 28자를 창제하였습니다.
단어집은 음양의 원리에 근거하고 자음은 오행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 언어는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통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결국 자기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이것을 불쌍히 여겨 28자를 새로 만들었다.
다만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고 매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 세종어제훈민정음
1446년(세종 28년) 9월 29일 훈민정음이 발령되고, 예조판서 정인지가 서문을 썼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계해년(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는 처음으로 28개의 정음을 만들었습니다.
의례를 간략하게 들어 훈민정음이라고 부릅니다.
사물의 모양을 모방하여 글자를 만들고 고전을 모방하여 소리로 일곱 음조를 맞춥니다.
삼극의 의미와 이기의 묘미를 포함하여 28자로 무한히 바뀝니다.
간단하고 요령이 있으며 정밀하고 막힘이 없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자는 반나절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보는 열흘 만에 습득합니다.
이 글자로 고문을 해석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소송을 중지해 주시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운은 탁함을 구별하고 악가는 율여가 융합되기 때문입니다.
쓰고 싶으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없고, 어딜 가나 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바람소리와 학소리, 닭소리, 개소리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1446년) 9월 29일 (갑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