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 (1367년 6월 21일~1422년 5월 10일) :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조선의 제3대 왕 (재위기간 : 1400년 11월 28일~1418년 9월 9일)
1. 법령 개정 그리고 사병의 혁파
태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끝내기 위해 관제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유교 정치에 주력했습니다. 사병을 해체하고, 병권을 일원화하여 중앙 제도와 지방 제도를 재정비하여 고려의 잔재를 완전히 제거하고 의흥부를 폐지하고, 병조 지휘권을 확정하는 등 군사제도를 보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였습니다. 토지 제도와 세제 정비로 국가 재정이 안정되었습니다. 억불숭유 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각지의 사찰을 정리, 사원전을 몰수하였습니다. 또한 호패법, 서얼금고법을 시행하여 국방에 힘쓰고, 야인 관리에 힘쓰는 등 국가 기강을 안정시켰습니다. 병사들의 혁파에 의해 고려 이래 각 지역의 실력자 개인이 이끄는 병사 조직이 없어지고 그들은 농부가 되거나 군역에 편입되었습니다.
2. 관제 개정, 신문고의 설치
태종 시대에는 모두 4차례의 관제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권근과 하륜 등이 태조 대에 정도전이 설정한 제도 방향을 수정하면서 왕, 의정부, 육조, 언관 체제가 이 시기에 정착되었습니다. 태종 14년에 6조 직계제를 통해 의정부와 6조 관료 직속의 왕이 정무를 관리했습니다.
그가 관리들을 잘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말에 10년간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에 관리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402년(태종 2) 태종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듣고 정적을 찾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한양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등 나라 전체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였습니다.
주자소가 설립되고 구리활자가 만들어지고, 호포가 폐지되고 저화가 발행되었습니다.
3. 공신 숙청
태종은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자신을 등극시킨 공신을 추방하거나 처형했습니다. 이런 태종의 노력을 바탕으로 당대와 이후 세종 시대에 조선은 정치적 안정과 문화, 군사적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태종은 먼저 개국공신이자 자신의 옹립에 기여한 이거이 부자를 추방하고, 공신이자 오른팔 안성부원군인 이숙번을 추방한 뒤 사후 100년 이상 도성 출입을 금지한다는 금족령을 내렸습니다.
원경왕후의 아버지 태종의 장인 민재는 건국의 공신으로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 민무휼과 민무회 등은 모두 1차, 2차 왕자란 당시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인물입니다. 장인 민재의 가족이 외척으로 성장하여 세자 양녕대군을 지지하고 그들 주변에 인물들이 모여들자 장인과 처남을 과감히 제거하였습니다.
장인 민재는 곧 병으로 사망하고 장인이 사망함과 동시에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유배시켰고, 이후 민무휼과 민무회도 사형에 처했습니다. 이렇게 태종의 처가는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태종은 1405년 권근의 요청을 받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에 자신이 제거한 정몽주를 추증하였는데, 자신이 제거한 사람을 영의정에 올려 자기 포용력을 외부에 과시하려는 의도였습니다.
4. 서적 간행물
1403년 태종은 주자소 설치를 명하고, 계미자 활판을 제작하여 직접 감독하였습니다.
1404년 2월 추락사고가 발생했는데 실록에는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1413년에는 즉위 후 추진한 사업을 총괄하여 경제육전으로 재편찬하였고, 원집상절과 속집상절 두 권을 발간하였습니다.
1414년 정도전이 편찬을 시도했으나 중단된 고려사 편찬 작업은 조준, 권근, 하륜 등에게 편찬 계속을 명하고 권근과 하륜에게 삼국사의 재편찬을 명했습니다.
5. 정권 후반
1417년부터 퇴위 직전까지 서운관에 소장한 각종 예언서와 무속, 비기도참서를 혹세무민하는 서적이라는 이유로 폐기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황태자이지만 학문 공부를 게을리하고 자유분방한 활동을 좋아했습니다. 장녕의 스승 계성군이 태종을 찾아가 수업을 할 수 없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양녕대군은 각지의 기생들을 궁궐로 데려갔고, 태종은 양녕이 가져온 기생들을 판자로 삼아 궁궐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양녕은 부왕 태종이 여러 후궁을 이끌어 왔음을 언급하며 항변했습니다.
양녕대군의 폐위 확률이 높아진 후 효령대군은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효령대군의 아버지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가 충녕대군을 생각하고 있음을 암시하자 실망한 효령대군은 불가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에 귀의하였습니다.
셋째 아들 충녕대군은 눈병, 병으로 병상에 누워 그 옆에 책을 끼고 있었습니다. 태종은 충녕에게 책을 읽지 말라고 명했지만, 충녕은 몰래 책을 숨기고 병상에서도 책을 읽도록 했습니다. 또한 태종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생 성녕대군을 간병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1418년 태종은 양녕대군이 하루 종일 방탕한 생활을 하도록 했다는 이유로 왕세자 자리에서 폐위하기로 했습니다. 아내 원경왕후와 상의하여 양녕대군을 폐세자 하기로 하자, 대신들은 모두 찬성하였고, 황희 등 소수만이 반대하였습니다. 태종은 6월 양녕을 왕세자 위치에서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즉위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도 유배당하게 되었습니다.
태종 정권 말 가뭄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논이 갈라지고, 밭은 타들어가 백성들은 풀뿌리로 끼니를 대신하는 등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가뭄이 계속되면서 민심은 날로 불안해지고 서민들의 삶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태종도 각 군 관찰사를 불러 민심을 수습하지 못한다고 비난하였으나 장기간 가뭄으로 식량이 고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게 되었습니다.
태종은 가뭄 속 뙤약볕 아래 하루 종일 앉아 하늘에 비가 오기를 기원하였습니다.
태종은 죽기 전까지만 해도 기우를 위해 노력했다고 하나 붕어 직전에 "내가 죽고 영혼이 있으면 반드시 이 날 만은 비로 내리게 할 것이다."
그 후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에 예외 없이 비가 내렸고,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우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