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청 외교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대명사대외교를 해왔습니다. 자신을 중국의 번국적 지위에 두는 사대 외교를 하는 동안 조선은 겉으로는 신하라고 주장하면서도 속으로는 조선과 중국은 별개의 독립 국가라고 강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후 조선은 재조지은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먼저 대명 의리를 지킬 명분이 생겼습니다. 대명 의리는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이기도 합니다.
병자호란과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명나라와 같은 사대를 지냈지만, 내부적으로는 청나라를 오랑캐로 인식했습니다.
조선 효종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힌 치욕을 감추기 위해 북벌을 주장했습니다. 이후 북벌이 불가능해진 정조 때 양반들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연호를 사용하여 자신을 중화,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겼습니다.
명나라 때 베이징에 다녀온 기행문의 제목이 '조천록'이었던 것에 반해 삼전도의 치욕이 있고 난 뒤에 '연행록'으로 바뀐 것이 대표적입니다.
조천록은 황제국의 수도를 한 곳만 방문한 기록이고, 연행록은 세계 여러 나라의 수도 가운데 하나인 연경을 방문한 기록이라는 의미입니다.
정조 때가 되면 청나라를 바라보는 시각 중에서도 문화재가 풍부한 선진국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북학파 실학자들은 중국의 선진문화재를 배우는 의견을 개진했고, 박지원은 열하일기 서문에 '숭정후삼경자' 연호를 사용해 명나라 멸망 130년이 지나도록 연호를 사용했음을 풍자했습니다.
그러나 북학파의 주장은 새로운 문화재 도입을 부분적으로 수용했을 뿐 당시 주도했던 중화 의식은 여전히 청나라를 오랑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중화 의식은 사실보다는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조선 후기 대청 외교는 예속의 정도가 점점 심각해져 정조 때 한두 차례 교제하거나, 황제라 칭하여 독립 연호를 사용하는 등의 상고가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정신 이상의 목소리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동지사를 비롯한 여러 사신을 정기적으로 파견하여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청나라에 보고하였고 청나라도 명나라보다 간섭이 많았습니다.
한편, 대청 외교는 조선이 개인 간 무역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교역로도 중요했습니다. 사신 행렬과 동행하는 공무역인 개시에는 반드시 역관의 개입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역사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영조 정조 때인 18세기에 이르러 사무소로서의 후장 무역이 개장 무역보다 규모가 커졌습니다. 무역업자는 거래하는 제품의 시세차익으로부터 이익을 얻고 품목에 따라 10~20배의 차액을 남길 수도 있었습니다.
2. 대일 외교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과 국교를 회복하고 통신사를 파견했지만, 조선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일본도 18세기 후반 들어 대기근과 폭동이 발생하는 등 내정이 혼란스럽고 막부의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통신사를 오랫동안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조 때는 통신사가 한 번도 왕래가 없었고, 마지막 통신사가 파견된 것은 1811년(순조 11)입니다. 일본은 재정난을 이유로 통신사를 초청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조선 통신사들이 자신들을 조선보다 한 단계 낮다고 생각하고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습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입국하자 행렬 앞에 청도, 순시, 영이 적힌 깃발이 내걸렸고, 일본 성리학자 나카이 지쿠잔은 막부의 섭정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게 청도는 도로를 청소한다는 뜻이며, 순시는 국내를 순회한다는 뜻으로 명령 깃발을 비롯한 나라의 수치라고 주장했습니다. 정조시대 일본과의 외교는 동래와 대마도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3. 서양과의 만남
조선 초기에는 서양의 존재도 조선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정확하지 않지만, 중국 서쪽에는 인도, 아프리카, 유럽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베이징에 가톨릭교회를 설립하고, 마테오 리치는 가톨릭의 교리를 설명하는 '천주실의'를 발간하여 서양의 다양한 문물, 종교, 문화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환기하기 위해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했습니다.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가 숙종 때 조선에 전해지면서 사본이 제작되었습니다.
청나라 때에는 서양 역법을 참고하여 기존의 역법을 개정하는 시헌력이 만들어졌고, 조선에서도 1653년(효종 4)부터 사용되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재의 출현은 당대 사람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영조시대 기술자인 최천약이 천문기기를 만들어 자명종 부품을 만들어 수리했습니다. 정조도 이러한 서양 문화재를 많이 접했고 40대 이후 시력이 저하되자 안경을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문화재를 수용하는 것과는 달리 새로운 사상을 엄격히 탄압하고 정조는 서양학의 이름으로 들어온 천주교를 사학으로 배척했습니다. 이것은 오래된 이론의 입장과 같습니다.
1791년 신해 박해로 권상연과 윤지충이 처형되고 천주교 반대론이 힘을 얻었으며, 1795년(정조 19) 주문무라는 중국 천주교 신부의 밀입국 사건이 적발되어 정약용이 외직으로 옮겨지면서, 채제공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남인들은 중앙 정치에서 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습니다.
4. 문화
정조 자신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김홍도에게 '주부자시의도'를 그리게 하고, 송시열의 자찬이 담긴 '송시열 초상화'에 감상문을 쓰는 등 문화 활동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화원들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화서 운영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1783년(정조 7) 도화서 화원 중 자비 대령 원을 선발하여 규장각에 파견하여 왕실의 주요 화사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정조는 규장각 자비 대령 회원제를 운용하여 화원마다 장단점을 하나하나 음미하는 섬세한 안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다양한 의궤와 군사 훈련을 다룬 '무예도보통지', 송시열 문집을 정리한 '송자대전', 정조 자신의 글을 정리한 '홍재전서' 등 많은 책을 발간했습니다. 또한 이순신의 문집을 정리하여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였고, 특히 이순신의 일기에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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